그림과 관련해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내 모든 것은 아직 낙서다~ 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내가 혼자 놀수 있는 것, 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놀이를 낙서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손바닦크기에 낙서들이건 대문만한 낙서건 모든 것은 낙서다. 상상을 자극하는 필요 이상으로 필요한 자극은 낙서로도 충분 할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몇몇 낙서가 좋은 작가분들에 작업 노트를 보면서 의지를 불태우곤 한다. 작년 한해 블로그를 하면서 내 낙서들을 공개해 보는것, 생각 이상으로 들여다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들여다 보는 블로그들은 아직 작가들이 숨어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 작가들이 블로그로 소통하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다. 만나야 하는 부담도 없고...
아는 분이 Bloglines 을 사용하는데 피드 등록을 하려고 하면 피드 정보를 읽어오지 못한다고 한다. 티스토리를 개인 도메인으로 http://kr.dnsever.com/ 통해서 연결한건데 bloglines.com 에 아이디를 만들고 접속해서 등록을 해 봤는데 등록이 되지 않는다.
연휴 기간 시작으로 오랜만에 시간이 남고 해서 친구와 블로그 스킨을 조금씩 수정해 가면서 익히는 중인데, 버튼을 몇개 추가 하고 한것 말고는 건드린거 없는데... 처음엔 스킨 버튼 눌러서 들어가면 코드로 된 것들을 잘못 해서 삭제라도 할까봐 들어가지도 않았었는데, 친구도 블로그를 하는 덕에 내가 원하는걸 대부분 도움 받아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피드 등록이 안된다는건 왜인지 모르겠다.
이그림을 이글루스에 올리면서 반으로 잘라서 올렸었다. 나무를 깎기 위해서 헌 종이를 꺼내다가 이그림이 있길래 봤더니 생각 보다 상태가 좋았다. conte 에 조합, 마감에 대한 실험 검정색 conte 와 붉은색, 그리고 물감으로 조합된 것이 캔퍼스지에서 마감하기 까다롭다는 걸 이때 부터 실험해 봤을 거다. 기본 재료로 종이는 편하고, 쉽게 깔끔한 완성도를 표현해주지만 천이 주는 은은함이나 확장성은 적은 편이다. conte 마감을 실험 하면서 흔히 사용한다는 방법은 이상하게 나와는 잘 맞지 않았었다. 이그림은 마감이 잘된 편이라 버리진 않았다. 정종미 작가에 재료에 대한 실험은 표현에 한계를 재료로 넓힐 수 있다는 매력, 충분한 가능성을 담고 있어서 인지 한 가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숨어 있는 것이 뭘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고민은 그림에 대한 재미 만큼 즐거워지는 상상이다.
나무에서 열리고 있는 목들과 발광하는 몸뚱이들. 몸뚱이들은 어서빨리 머리가 익길 바라고 있다
conte 는 매력있는 재료 이면서 사용하기 까다롭다는 필연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conte로는 작은 그림 보다 큰그림을 그리는게 더 편하다 보통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작품에 대한 공개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자료 만큼은 아니지만 되도록이면 완성작, 공개작들 중에서도 선별된 것들을 웹에 공개한다. 웹에서 보여지는 것은 가벼울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잘찍은 사진이라도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다. 주변 분들중에는 아직도 공개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다. 특히 웹에 대한 거부감은 바꾸기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샴비가 나와 함께 있게 된 뒤부터 샴비에게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지금도 종종 그렇지만, 전 주인들에게 버려진 녀석이 나와는 성격이 너무 잘 맞아서 물건사러 가거나, 갤러리 가거나 하는 몇시간 정도 일들에는 함께 외출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하다 보니, 잠도 적게 자고 산책하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된것 같다.
야옹이와 산책하는건 멍멍이와 산책하는 것 보다는 역동적이지 못하지만, 평소 보다 주변을 많이 둘러 보게 된다.
샴비도 집안에서 사는 녀석이다 보니, 길고양이들 만큼 역동적이지 못하고 주변 작은 변화를 무시하지 못한다.
산책길에 고양이 네마리를 키우신다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간혹 산책중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아는 고양이에 대한 기억을 서슴없이 꺼내 놓는다. 내가 사는 동네에 한블럭 아래에 사시는 노부부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시다가 집안에 눌러 앉게되서 키우게 되셨다고 하시는데, 산책하는 샴비를 신기하게 생각 하셔서 산책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시지만 고양이는 산책을 하지 않는 동물이라고 생각 하셔서 한번도 함께 산책나갈 생각을 하시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마침 나와 마주친게 함께 키우는 멍멍이와 산책중 이셨다.
고양이는 멍멍이들 만큼 밖으로 나올 기회가 많치 않다. 길고양이든 집고양이든 고양이가 사람들에 눈치를 보는 만큼 주인들도 사람들에 눈치는 보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에서 고양이에 외출이 문제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정도에 보호 아래서 집고양이들도 적절한 외출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 된다.
나 또한 나의 외로움, 불안, 고독함을 숨기고 조용히 방안에서 표출하거나 더욱 더 억누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것들은 고름이 되어 터지고,
아물지 않고, 더욱 더 벌어져
어디서 부터 치료해야 할지 방법조차 찾지 못한다.
고독함, 우울함, 외로움...
사회에서 부정적 시선으로 거부하더라도,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외면당한,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들의 아품이
다시 사회적 무제로 대두되지만, 사회는 다~ 개인을 탓하기에
사회에 기댈 수 조차 없다.
사회적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
시작해 보자,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을 보여줌을..
이대로 살다가는 자살한다.
남이 손가락질 하던, 무시하던 신경쓰지 말고, 강하게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물론 귀찮겠지만, 재미없는 삶보단 좀더 열정적인 삶을 살자.
이것은,...
개인에서 시작해 공통적 요소를 가진 개개인들이,
내 그림을 통해서 다시 자신을 바라보고
이러한 요소가 배제된 사람들은 거부감이 들겠지만, 어느정도 인식하기를 바래서이다.
협오스러운 것은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혐오스러워 보이는 것들은
재료로 표출된 내 장난 일 뿐이다.
나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
난, 즐겁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사회적이란 단어로
불안과 거부, 소외라는 무제적 실체를 만들어 낸다.
내안에 있는 것이 불안하기만 한 것일까?
난, 입에서 털이 나오는 즐거운 상상을 했을 뿐이다.
내 ego 라는 고양이는 맨몸으로 길 한가운데 나 앉아 혐오와 소통을
동시에 바라는 것이다.
소통,
스스로 소통을 거부하면, 자신 내면의 아품은 씻겨가지 않고,
그 아품은 익숙해져 감정을,.. 마치 강한 마취약을 섭취한 것처럼
무덤덤해 진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개인과 환멸,
모든 요소와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해야 내면의 아품은 엷어질 수 있다.
회화는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분야이다.
번거롭고, 관심받기에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 훼손되기 때문에
쉽사리 들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퍼포먼스, 조각, 설치... 다양한 방식들이 있지만
내 이야기를 가장 잘 표현할 것이 회화이고,
집구석과 갤러리에 숨어있는 나 자신이 나가야 할 곳에
그림도 함께 들고 나가 보자고
생각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대인기피, 대화부적응, 소심함, 부정적 사고를 이런 계기로
내 스스로에 인식을 변화해 보려 한다.
오히려 이런 점들이 결과적으론 더 강해질 수도 있을 법 하고, 시도라는 점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가보려 한다.
작년 부산 전시로 보일라에 들렀을때 봤던 응삼이다. 보일라에 고양이 세마리가 함께 생활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샴비와 부산에 내려가기 전부터 기대에~기대를 했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복길이와 응삼이, 길용이를 만나고보니, 샴비와는 다르게 샤~~프하게 생긴 모습에 반했었다.
응삼이
사진으론 커 보여도 샴비와 나란히 두면, 응삼이 머리가 샴비 어깨 정도 온다.. 뚱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해서 엄청 뚱뚱하고 커다랄 줄 알았는데, 샴비에 비하면 소말리아고양이랄까~
텃세를 부리는 탓에 샴비와 있는 동안 샴비는 도망 다니고, 응삼이는 쫒아 다니며 사이좋게? 싸움을 했었다. 그동안 샴비는 서울에서 응삼이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복수에 발톱을 갈고, 싸움에 기술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 응삼이가 어제 죽었단다.. 오피스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데.. 소식을 접하고, 갑자기 샴비가 죽을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샴비도 나보단 일찍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나보다 오래 살거라는 환상을 가질 수도 없다.
올해 전시에 대한 고민은 아직 크게 하지 않고 있다.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작년 전시를 마치면서 아쉬웠던 부분들은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나 완성된 작품에서 보다는 전시장에 설치된 이후에 더 컸다. " 아무도 모른다 " 이후 EGO 라는 사탕을 물다 에서 바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생각 하는 기준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물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였다. 같은 사물이라 하더라도 시간, 공간 또는 그 어떤 것 들 때문에 외곡되거나 변형되는 것 같다. 아니, 그렇다고 봐야 한다.
내가 나를 구속하고 힘들게 하는 것 처럼...
사물이, 그림들이 시간이나 공간에 스스로 변형되는 과정을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맞춰진 틀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 하게 된다.
지난 일요일 샴비와 외출을 했었다. 목적지가 있었고, 집에선 이,삽십분 정도면 버스타고 갈 수 있는 곳이라 느긋한 마음으로 샴비를 이동가방에 담그고? 나갔다.
외출을 좋아하는 샴비지만, 이녀석은 가방안에 들어가 있는건 싫어한다. 그날도 문을 나서면서 부터 냥~냥 거리길래 평소처럼 그냥 가도 되겠지~ 싶었다. 현대갤러리 앞에 도착했을때 샴비가 갑자기 오줌을 싸기라도 하듯 가방 바닦을 마구 긁어대며 웅얼 거렸다. 혹시 오줌이 급한가 싶어 목줄을 하고 정 급하면 흙위에라도 싸게하고 휴지로 흙에 오줌을 닦아 낼 생각으로 10분여를 기다렸지만, 가방에서 나오는게 목적이기라도 한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도보에 흥이나 있었다.
그날따라 오후가 되면서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샴비녀석에겐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 였다. 도보를 하는건 좋지만, 감기라도 걸리면 몸도 고생이고 큰 탈이라도 날까 몇일을 걱정하고 있을 내 모습도 뻔히 보이기 때문에 다시 가방안에 담가 둬야 했다. 가방안에 있지 않겠다고 어찌나 날리를 치는지... 결국 목적지까지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오고야 말았다.
책을 잘 사지 않지만, 이 책은 페이지 마다 길고양이들에 사진이 있고, 설명적이고 딱딱한 듯한 글이면서도 뭔가 알수 없는 따뜻함이 담겨 있는 글솜씨로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길고양이 님과 함께 살고 있는 스밀라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은 부분 차지 하고 있다. 책내용중 3.5키로인가 한다는 스밀라... 우리 샴비에 어린시절 잠간 스쳐 지나갔던 몸무게다.
"사람들에게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를 묻는다." 어떤 특별한 기억때문에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고양이는 눈이 무서워, 고양이는 해꼬지를 해서... 샴비와 1년 가까이 생활 하면서, 산책중 샴비를 본 어른들 대부분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 하지만, 또 묻는다. 고양이를 키운적이 있느냐고.. 대부분은 키운적도 없다. 단지, 어디선가 들었던 말, 그리고 길에서 보이는 날카로워 보이는 녀석들에 모습이 고양이는 정을 줄 수 없는 녀석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 중학교 입학을 하는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생활에 대한 막막한 불안과 떨리는 발걸음으로 학교로 향하던 기억이 난다. 그리 크지 않았던 곳이라 학교에 가봐야 절반은 아는 얼굴이고 나무지 절반도 어디선가 봤을 얼굴들 이지만, 새롭다는 것은 불안할 때가 있다.
요즘, 뭐~ 들어나 있는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였지만,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일이 늘었다. 지금, 내 나이는 아직은 지난 시간을 그리워만 하고 있거나 할 나이도 아닌데 무언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느낌 만으로도 숨을 고르고 있어야 할 정도로 심장이 콩닥콩닥 거린다. 숨가뿌게 생활하고 있지도 않는 내가 말이다.!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건 내가 아니고, 내가 가진 무엇도 아닌데,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 뿐이다. 느낌만, 그래서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다.
깜깜한 부엌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일어나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누르려고 보니 이미 켜져 있었다. 형광등도 들어와 있었다.